교회의 새하얀 피아노가 하나 있는 것을 기억한다. 평소에는 하얀 천으로 덮여있어 자세히 볼 수 없지만, 일요일에는 이스카리오가 다가와 씌웠던 하얀 천을 치우고 의자를 몇 번 툭툭 쓸더니 자리에 앉는다. 지휘사는 멀리서 그의 행동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허옇고 가느다란 손이 묵직해 보이는 커다란 덮개를 걷어냈다. 아무도 관리를 안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큰 착각이었다. 공중에 먼지 한톨 날리지 않았으며 피아노 위의 먼지도 보이지 않았다. 한 손에 끼고 있던 검정색 장갑을 벗어 의자 옆에 올려놓는다. 건반 위에 얹는 손길에 침을 꼴깍 삼키며 바라보았다.
새하얀 손가락들이 하얀 건반과 검은 건반을 자유롭게 휘저으며 돌아다닌다. 연주되는 곡은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곡이었다. 이름은 잘 모르지만. 메트로놈이 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는 정확하게 박자를 맞추며 연주하는 듯 했다. 지휘사는 가만히 건반 위에서 빠르고 정교하게 움직이는 손을 손끝부터 손가락 마디까지 눈으로 훑었다. 아름다워, 그의 연주를 보다 보면 홀린듯 연주가 끝날 때까지 바라보게 된다. 기도를 하러 온 사람들도 그녀와 마찬가지였다. 숨을 죽이며 그의 연주를 끝까지 지켜보다 연주가 끝난 뒤에야 숨을 돌리며 박수로 환영한다.
"어라, 대장 기도하러 오신 건가요?"
"하하…그건 아니고, 고등학교에 일이 있어서 갔다 오는 길에 들렀는데 피아노 연주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는 거야. 가기 전에 조금만 듣고 가려고 했는데 이스카리오의 연주가 너무 훌륭해서 그만…."
"그리 말씀해주시다니 영광이네요. 피아노 연주를 좋아하시나요?"
"흠, 글쎄 기억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듣다보면 빠져들게 되더라고. 아마 피아노 연주도 훌륭했지만 이스카리오가 연주한거라 더 열중한게 아닐까?"
생각한대로 말했을 뿐인데 이스카리오가 약간 놀란 기색을 보이더니 눈꼬리를 휘며 이쁘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지휘사가 오히려 멋쩍은듯 볼을 긁적 거리며 물러섰다.
"나 아직 일할거 남아있어서 이만 갈게. 다음주에도 또 들었음 좋겠다!"
"다음주는 아마 힘들 것 같네요. 해야할 일이 있거든요."
곤란하다는 어투로 말하는 이스카리오의 말에 지휘사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듣자하니 오늘이 마지막 연주였던 거다. 저도 모르게 입이 삐죽 나온 지휘사는 아쉬움을 계속 보이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스카리오는 축 쳐진 그녀의 등을 보고는 작게 조소를 지었다. 마치 덫에 걸린 새 한 마리를 보는 듯한 눈이었다. 지휘사가 세 걸음쯤 나아갔을때, 상냥한 얼굴로 바꾸곤 지휘사를 향해 목소리를 내었다.
"그럼, 내일 한 번 찾아와주세요. 대장을 위한 연주를 들려드릴테니."
기대에 가득찬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 그녀는 매우 신나 보였다. 이스카리오에게 다가가 두어 번 더 정말이냐며 확인을 하더니 신이 나서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이스카리오는 다정하게 새끼손가락을 걸어주었다. 독사의 속셈인지도 모르고 마냥 미소를 보여주는 단순한 지휘사가 돌아간 후, 그는 방에서 남몰래 비웃었다.
다음 날 저녁, 약속대로 지휘사는 이스카리오를 찾아왔다. 기대의 부풀어 오른 눈빛은 어린 아이와도 같았다. 기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시각, 이스카리오는 미소를 지으며 이리오라 작게 손짓했다. 손길에 따라 피아노 앞에 서자, 이스카리오가 의자에 앉아 옆에 앉으라며 의자를 툭툭 친다.
"옆에 앉으면 손 움직이는데 방해되지 않아?"
"오늘은 가벼운 곡을 연주할 예정이니 괘념치마세요."
이스카리오의 친절한 미소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옆에 앉아 그의 연주를 기다렸다. 곧게 뻗은 손가락들이 부드럽게 건반을 두드린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손가락들에 다시금 넋이 나간 듯 바라보았다. 마치 손가락이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은 어제보다 느린 곡인 덕에 그의 손을 더욱 자세히 엿볼수 있었다. 얇은 손목은 건반 위로 붕 떠있는 듯 하면서도 손가락이 올곧게 움직일 수 있도록 조종하고 있다. 손가락이 꼭두각시 인형이라면 손목은 조종사 같다고 해야하나. 유연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기에 움직이는 인형같이. 그는 무감각적인 얼굴로 늘 정교한 연주를 한 건가. 그의 이면을 본 기분에 저도 모르게 등이 오싹해진다.
"어떠셨나요?"
연주가 끝나고 나자, 그가 익숙한 미소로 지휘사를 반겼다. 미소에 안도한 지휘사는 같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최고였어. 하나뿐인 방청객이 홀로 박수를 보낸다. 이스카리오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늘 장갑을 쓰고 있던 손을. 지휘사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스카리오가 작게 웃음 소리를 내곤 말한다. 손을 이리로.
새하얀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얹자 차가운 촉감만이 머릿속에 남았다. 그는 다른 손도 그녀에게 내밀었다. 지휘사는 거부감없이 다른 손도 내주었다. 이스카리오는 그녀의 손바닥을 제 손가락으로 천천히 간질이듯 쓸더니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고는 건반위로 손을 얹어주었다.
"이스카리오…나 연주 할줄 모르는데."
"괜찮아요, 제가 알려드릴테니."
이스카리오는 몸을 일으켜 걸음을 사뿐사뿐 옮겼다. 등 뒤로 굽이 있는 신발 특유의 발걸음 소리가 어쩐지 등을 긴장되게 만든다. 긴장한 등 뒤로 다가오더니 하얀 손이 지휘사의 손 위로 겹쳐온다. 이스카리오…? 뒤를 돌아보면 그와 얼굴을 가까히 마주볼 것 같아 차마 뒤를 돌진 못 하고 이스카리오의 이름만을 불렀다. 이스카리오는 지휘사의 손과 제 손을 엮듯 유연하게 제 손가락을 훑는다. 이때마저도 아름답다며 저도 모르게 조용히 손가락들을 바라보았다.
"대장은 저보다 제 손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응? 아, 아니야-. 그냥 손가락이 어떡하면 저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이나 싶어서."
변명을 믿어주긴 할까, 이스카리오는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의 손놀림에 눈길이 사로잡히는건 사실이었다. 연주할때도 난 연주곡을 열심히 들었던가, 아니면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손가락들을 아름답다며 혼이 빠진 사람처럼 봤던가. 알 수 없었다. 이스카리오는 가볍게 지휘사의 손을 잡아 건반을 살며시 눌렀다. 천천히 다른 손가락을 눌러주었다. 몇 번을 반복하더니 한 번 해보라는 듯 손을 거두고는 지휘사를 바라보았다. 지휘사는 제 손에 닿았던 차가운 손길을 기억하며 순서대로 음을 눌렀다. 다소 긴장한 탓에 손에서 땀이 나는지 하마터면 건반 위로 잘못 미끄러질 뻔했다. 지휘사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스카리오는 천천히 지켜보았다. 이스카리오가 알려준 부분까지 건반을 누르자 그는 박수를 천천히 치며 웃어보였다.
"처음하시는 것 치고는 곧잘하시는 군요."
"정말? 이스카리오가 칭찬하니 자만하게 될 것 같아."
칭찬을 받아 기쁜 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웃어보였다. 느릿했지만 이스카리오가 눌렀던 건반을 따라 누른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이스카리오는 시계를 바라보더니 지회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보셔야 할 것 같네요."
"윽, 시간이 벌써…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연주해주면 안돼?"
"다음에 또 시간이 나면 불러드릴테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더 이상 조르면 민폐니 지휘사는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내민 손을 잡기에는 처음으로 피아노를 연주한 덕에 땀이 스며들었기에 혼자 일어나려 했으나 이스카리오가 덥석 손을 잡아왔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축축했던 손이 잡히자 지휘사는 곤란한 기색을 보였으나 이스카리오는 신경쓰지 않았다.
"생각보다 긴장을 하셨군요."
"으으, 당연하지 처음 해보는 걸."
"다음에는 제가 좋아하는 곡으로 알려드리도록 하죠."
빙긋 웃으며 다음을 기대하라는 듯이 말해오는 그의 금안이 빛났다. 그 눈에 홀린 듯이 지휘사는 이스카리오를 마주보았다. 잡고 있는 길고 가느다란 손이 손등을 간질이며 떠났다. 손에 닿았던 차가운 체온이 자꾸만 손에 감겨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애꿎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이스카리오는 가끔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단 말이야…. 오늘은 쉽사리 잠에 들긴 어렵겠다고 생각했으나 일하러 돌아다니느라 피곤이 쌓인 덕에 그대로 침대에 뻗었다.
눈을 떠보니 온통 새하얬다. 무어라 소리쳐도 돌아오는 말소리가 하나 없었으며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아 소름이 끼쳤다. 한참을 뛰어다니며 기억하던 이름들을 불러보았다. 앙투아네트, 안, 안화…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새하얀 공간을 볼 때마다 고독함에 미칠 것 같아 주저앉아 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어떡하지, 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 자그만한 소리가 귓가를 툭툭 간질였다. 피아노의 건반 소리, 박자에 맞춰 정교하게 움직이는 손길의 주인을 지휘사는 알고 있다. 울것 같은 얼굴로 지휘사는 다급하게 몸을 움직여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이스카리오…!"
이스카리오는 말없이 검정색의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는 연주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어느 틈엔가 피아노 옆에 방청객 의자가 하나 생겼기에 지휘사는 그곳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이스카리오는 지휘사가 이곳에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몇 번을 더 불러보아도 그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지휘사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가 연주하는 곡을 위로 삼아 들으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러 노력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악보는 분명 한 페이지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곡이 빠른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느릿한 곡인 덕에 이스카리오의 움직이는 손을 감상할 수 있어 감사했다. 허나 끝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한 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면 이미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는데, 연주가 도통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지휘사가 벌떡 일어나 이스카리오에게 다가갔다. 이스카리오는 미동도 없이 침묵속에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지휘사는 잘 모르는 악보를 빤히 쳐다보았다. 음악에 대해 잘 알지는 없었지만 악보가 묘하게 이상하다는 느낌은 느낄 수 있다.
"음표 사이에 마디가 없어…."
악보 머리에는 이리 적혀 있었다
[연주자에게 이 동기를 840회 연속으로 연주하시오.]
"…이상해."
지휘사는 주춤하며 피아노에게서 물러섰다. 이상한 곳이야,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해괴한 느낌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덜컥 겁이 난 지휘사는 빠르게 다른 곳으로 달렸다. 한참을 달려도 피아노와 멀어지질 않았다. 도와줘! 아무리 외쳐도 들리는 것은 제 목소리 하나 뿐이었다. 귓가에 연주곡이 흘러들어온다. 듣고 싶지 않다며 귀를 막아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이스카리오의 하얀 손가락들이 춤을 추듯 선율을 연주해 나간다. 뱀의 속삭임을 들은 것 처럼 그녀는 다가가 의자에 앉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연주가 끝날 때까지.
연주가 끝나자 짝짝, 일정한 박수소리가 들려온다. 넋이 나간 사람 처럼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흡족한 미소를 지은 이스카리오는 그녀에게 다가가 뺨을 한 번 쓸어주었다. 현실 속에 당신은 원인불명의 가사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당신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당신에게 이 곡을 알려주기로 했다. 지휘사의 손을 살포시 잡아 피아노 앞에 앉혔다. 그리고는 건반을 하나씩 누르며 곡을 알려주었다. 웃음이 나온다. 당신은 세계가 멸망할 때까지 반복되는 곡만을 연주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불쌍한 당신을 위해 한 가지는 알려드리죠. 제 연주를 좋아하는 당신의 표정은 꽤나 마음에 들었어요."
혼이 나간 듯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진다. 과연 당신이 이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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